이수만이라는 취향
이수만의 A2O LITE가 일깨운 K팝의 오래된 감각
자연스러움이 유행이 된 시대,
대중은 왜 철저하게 설계된 무대에서 다시 진정성을 발견하는가.
“내 첫사랑이 할배였다고?”
신인 걸그룹의 데뷔 무대 영상에 달린 댓글치고는 별나다.
그뿐만 아니다. 일흔을 넘긴 프로듀서의 건강을 걱정하고 은퇴를 만류한다. 누군가는 그를 냉동 보관했다가 K팝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깨우자고 제안한다. 죽은 뒤에도 인공지능으로 그룹을 만들게 하자는 농담까지 등장했다.
아이돌의 영생도 아니고, 아이돌을 만든 기획자의 영생을 기원하는 형국이라니.
주인공은 SM엔터테인먼트의 전 총괄 프로듀서이자 현재 A2O엔터테인먼트에서 키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이수만(74)이다.
그가 선보인 9인조 걸그룹 A2O LITE는 2026년 10월 13일 데뷔곡 〈NEON〉을 발표했고, 이튿날 일부 음원 사이트서 정상에 올랐다. 신인으로서는 이례적인 성적.
그러나 순위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을 통해 되살아난 과거 K팝의 기억이다.
“보아를 다시 찾아냈다.”
“소녀시대와 에프엑스를 섞은 느낌.”
“이수만 당신이 있는 그곳이 SM이네요.”
일흔을 넘긴 프로듀서가 선보인 아홉 소녀에게서 새로운 K팝의 시작을 기대하는 것이다.
추억이 미래에 대한 기대로 바뀌는 기묘한 순간이다.
호평의 대상은 이 그룹의 꾸밈 없는 일상이나 친근한 모습이 아니다.
칼같이 맞춘 군무, 강렬한 전자음, ‘성녀 파트’(청아한 보컬이 전면에 나서며 곡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구간을 가리키는 표현), 이어지는 고음과 빈틈없이 설계된 동작.
이처럼 철저히 만들어진 무대에서 오히려 ‘진짜 K팝’을 발견했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한때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이 어떻게 진정성의 증거로 떠올랐을까?
처음 듣는데 왜 그리울까
“수만.zip.”
A2O LITE의 데뷔곡 〈NEON〉 뮤직비디오에 달린 댓글이다.
보아(BoA)의 2000년대 초 에너지, 소녀시대(Girls’ Generation)의 군무, 에프엑스(f(x))의 실험적인 음악, 에스파(aespa)의 가상 세계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음악과 미학을 이수만 프로듀서라는 이름으로 압축한 표현이다.
지난 수십 년 간 K팝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특징의 일부를 A2O LITE에서 재발견했기 때문에 나온 감상인 셈이다.
그렇다고 〈NEON〉이 과거의 인기곡을 그대로 재현한 복고 음악이라는 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음악적 문법을 제시하기보다, 익숙한 SM식 사운드를 오늘의 무대에 다시 불러낸 작품에 가깝다.
시대마다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현실보다 조금 앞선 세계를 무대 위에 구현하려는 이수만의 취향에는 지독한 연속성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일각에선 이런 반응도 나왔다.
“계속 양식만 먹다가 오랜만에 한식을 먹은 것 같다. 속이 다 시원하다.”
소녀들은 왜 국가대표처럼 보이는가
최근 K팝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미학 중 하나는 ‘자연스러움’이었다.
뉴진스(NewJeans)의 등장이 상징적이다. 무대 위에서 자신을 과시하기보다 일상의 연장처럼 보이는 움직임, 부담 없이 흥얼거릴 수 있는 음악, 친근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
복잡한 세계관과 비장한 무대 연출에 익숙했던 대중에게 그들의 힘을 뺀 태도는 하나의 발견이었다.
반면 A2O LITE의 무대에는 유난히 전투적인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독기, 소녀병기, 완성형.
독기를 품고 각 잡힌 군무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연예인의 쇼케이스보다 태릉선수촌 시절 국가대표팀의 경기를 지켜보는 듯하다.
인간에게는 일을 잘해 내는 것 자체를 추구하는 욕망이 있다. (미국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 Richard Sennett)
그 결과 뛰어난 공연은 감탄을 넘어 무언가를 직접 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훌륭한 연주를 듣고 오래 방치한 악기를 다시 꺼내는 것처럼.
A2O LITE의 무대를 보다 보면 수능 문제집이라도 다시 펼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다.
물론 라이브 가창력은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데뷔 무대의 퍼포먼스만큼은 일부 관객에게 강렬한 첫 인상을 남긴 건 사실로 보인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내가 스엠을 사랑한 게 아니라 수만 할배 취향을 사랑한 거였어.”
오랫동안 좋아했던 음악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고백이다.
〈NEON〉의 작사·작곡·편곡은 유영진 디렉터와 미국 음악 프로듀서 뎀 조인츠(Dem Jointz)가 함께 맡았다. 화제가 된 도입부 안무 제작에는 제이블랙(J-Black) 등이 참여했다.
그런데도 일부 팬들은 왜 이 그룹에서 이수만이라는 한 사람의 취향만을 발견한 걸까.
좋은 곡과 안무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인상적인 무대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곡을 선택하고, 어떤 안무를 채택하며, 음악, 춤과 영상 등 각각의 창작물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데는 또 다른 차원의 판단이 필요하다.
결국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특정한 곡이나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오랫동안 이수만 프로듀서가 내린 선택이 빚어낸 하나의 미학인 셈이다.
물론 확고한 취향은 강점인 동시에 함정이 될 수도 있다.
〈NEON〉을 반가운 귀환으로 받아들이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과거 SM 음악의 반복이라는 비판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재현하는 것과 또 한 번 시대를 앞서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럼에도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이수만 특유의 음악적 문법이 또 한번 다음을 궁금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수만 프로듀서가 또 어떤 선택을 할지. A2O LITE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그 시절 K팝이 남긴 감탄도 비슷했다.
저렇게까지 해내는 사람들이 다음에는 또 무엇을 보여줄까.
어쩌면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은 20년 전의 K팝 자체가 아니라, 그때 그 음악을 들으며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를 기대하던 마음인지도 모른다.
김도나 기자
기자 노트
한편 이수만 프로듀서를 향한 환호에는
음악 밖의 심리도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하이브의 영향력이 커진 K팝 시장에서
한때 SM을 이끌며 정상에 섰던 그는
이제 신인 걸그룹을 앞세운 도전자처럼 보인다.
대중은 때때로 잘나가는 1등보다
돌아온 노장의 반격을 응원한다.
하이브의 독주에 대한 피로감,
익숙한 판도가 뒤집히기를 바라는 기대가
이수만을 향한 호평에 일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강자가 어느새 도전자로 환영받는 것.
이 또한 흥미로운 역설이다.
독자의 질문
열세 살, 무대에 서기엔 이른가A2O LITE에는 만 13세 멤버가 세 명 포함돼 있다. 미성년자 데뷔를 우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은 가운데, 한 독자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졌다.
“보아 역시 만 열세 살에 데뷔해 시대를 열었다. 이미 무대 위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증명하고 있는 이들에게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재능을 가장 빛낼 수 있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어린 예술가를 산업의 논리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와, 준비된 개인이 재능을 펼칠 기회를 나이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
두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 독자 의견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